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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독립 위해 ‘밀알’된 신석구 목사

김민주 기자 (jedidiah@goodtv.co.kr)

등록일 2020-08-14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자주독립을 이룬데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앞장섰는데요.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굳건한 신앙으로 민족구원을 위해 헌신했던 신석구 목사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김민주 기잡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신석구 목사. 신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서울과 춘천, 원산, 남포 등지에서 전도와 목회활동에 힘썼습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신석구 목사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방황하다 고향친구의 전도로 33살에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신 목사는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1919년, 민족대표 독립선언 서명에 마지막 주자로 참여했습니다. 
신 목사는 일본어를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3~4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와 태평양전쟁 전승기원예배 요구에도 타협하지 않아 수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김진홍 목사 / 수표교교회 )
"일본 검사가 물을 때마다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내가 감옥에서 나간 뒤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독립운동 하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일본 순사 또는 일본 재판정에서 흔들림 없이 얘기했던 분이죠."

신석구 목사는 독립활동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와중에도 민족구원의 사명을 놓지 않았습니다. 외진 시골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습니다.

광복 후 북한에서 교회재건과 반공운동을 펼치던 신석구 목사는 신변이 위험하니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사역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다1949년,  반동비밀결사에 가담했단 혐의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50년 6.25전쟁 때 공산군의 총살로 순교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신 목사의 애국정신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김승태 소장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신석구 목사님의 공생애는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희생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신앙뿐만 아니라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니 내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내 동포 마음 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굴하지 않는 신앙으로 독립과 민족 구원을 위해 살았던 신석구 목사의 삶과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밀알이 되고 있습니다.
        
GOODTV NEWS 김민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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